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페르디난트 1세 (문단 편집) == 유년시절 == 형인 카를이 부친의 영지인 [[플란데런(역사적 지명)|플랑드르]]에서 나고 자란 반면, 페르난도는 [[카스티야 왕국]]의 알칼라데에나레스에서 태어나 외가인 트라스타마라 왕조[* 트라스타마라 왕조는 카스티야 왕국의 왕조였지만 동시에 아라곤 왕국의 왕조였다. 페르디난트 1세의 외할머니인 [[이사벨 1세]]와 외할아버지 페르난도 2세는 가까운 친척이었다.] 왕실에서 자랐다. 외할아버지인 아라곤의 왕 [[페르난도 2세]]와 생일이 같아서 페르난도 2세의 이름을 물려받았고 그의 총애를 받으며 자랐다. 외할아버지 페르난도 2세는 이방인이나 다름없는 첫째 외손주 카를보다는, 스페인에서 태어나 성장한데다가 자신의 이름을 딴 외손주인 페르난도를 더 좋아해 페르난도에게 아라곤 왕위를 물려주려 했고 아라곤 귀족들 또한 페르난도를 지지했다. 한편 형제의 친할아버지인 [[신성 로마 제국/역대 황제|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 1세(신성 로마 제국)|막시밀리안 1세]]는 결혼을 통한 영토 확장을 적극적으로 수행했는데, 그가 마지막으로 추진했던 결혼 정책은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국왕을 겸하고 있던 [[야기에우워 왕조]]와의 혼사를 성사시키는 것이었다. 사실 막시밀리안 1세는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신성 로마 제국)|프리드리히 3세]]를 괴롭혔던 [[마차시 1세]]가 적법한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무력으로 헝가리를 병합하려 했는데 이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유화정책으로 전환하여 양 왕가의 혼사를 추진했다. 1506년부터 시작된 막시밀리안 1세의 노력은 근 10년 동안 공을 들인 끝에 손자들이 어느정도 장성한 1515년에 결실을 맺었다. 당시 카를은 [[잉글랜드 왕국]]과 혼담이 오가고 있었고, 페르난도는 외할아버지인 [[아라곤 왕국]] 국왕 [[페르난도 2세]]와 함께 스페인에서 양육되고 있었기에 막시밀리안 1세로서는 두 손자 중 누가 신랑이 될 것인지 확정짓지 못 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막시밀리안 1세는 보헤미아·헝가리 왕녀와 최종적으로 결혼하게 될 두 손자 중 한 명을 대신하여 보헤미아·헝가리 왕녀와 대리 결혼식을 거행하였다.[* [[러요시 2세]]와 손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마리아]]도 이 때 약혼하였다.] 이후 무효가 된 잉글랜드와의 혼사와는 별개로, 스페인에 정착할 생각이었던 카를이 보헤미아·헝가리 왕녀와의 약혼을 오스트리아를 다스리게 될 남동생 페르난도와 성사시키면서 페르디난트의 운명은 크게 바뀌었다. 사실, 결혼 당시에는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영토를 합스부르크 가문의 페르디난트가 물려받을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거의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 러요시 2세가 쉴레이만 1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의 침공에 맞서 싸우다 1526년 젊은 나이에 후사도 없이 전사하게 되면서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한편 1516년 페르디난트의 외할아버지인 아라곤 국왕 페르난도 2세가 죽자 후계자를 두고 스페인 현지에서는 페르난도를 지지하는 상황이었으나, 친할아버지인 막시밀리안 1세가 직접 나서 교통정리를 하여 형 카를이 스페인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당시 페르난도는 아직 13세로 성년(15세)이 되지 않은 나이였지만, 카를은 장남인데다가 나이도 이미 성년을 넘겨 이미 [[합스부르크 네덜란드|부르고뉴 공국의 저지대 지역]]을 직접 다스리고 있었다. 카를 본인도 스페인 토착 세력이 이방인 자신보다 스페인에서 나고 자란 동생 페르난도에게 우호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카를은 스페인 국왕으로 즉위하고 나서도 1년 반이 지나도록 스페인 땅을 밟지 않고 플랑드르에 머물고 있었다. 카를은 자신의 스승인 [[하드리아노 6세|아드리안 데달]] 주교를 먼저 스페인에 보내 현지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된 후에야 스페인 땅을 밟았다. 모친인 후아나는 명목상 스페인 공동왕이었지만 정신병 때문에 오래전부터 유폐된 상황이었다. 공동왕인 어머니가 동생 페르난도를 지지하여 왕으로 옹립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한 카를은 스페인에 도착하자마자 유폐된 어머니부터 찾아가 페르난도가 아닌 자신이 스페인의 국왕임을 확인하는 서명부터 받아냈다. 그리고 고생해가며 스페인 전국을 순방하며 지방세력으로부터 왕위를 인정받았다. 한편 황제 [[막시밀리안 1세(신성 로마 제국)|막시밀리안 1세]]는 카를을 스페인의 왕위에 앉힌 뒤 1518년 페르난도를 플랑드르에 있는 고모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에게로 보냈다. 플랑드르는 막시밀리안 1세 본인이 젊은 시절 [[마리 드 부르고뉴]]와 결혼한 이후 독일왕으로 선출되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며 또 그곳에서 페르디난트의 아버지인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와 친형 카를이 나고 자랐던 곳이었다. 이를 두고 막시밀리안이 이미 오스트리아를 페르난도에게 물려주려고 조치했다는 해석도 있지만, 그보다는 당시 스페인 귀족세력의 지지를 받고 있던 페르난도가 카를의 스페인 왕위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일단 페르난도를 [[펠리페 1세|그의 아버지]](이자 막시밀리안 1세의 아들)의 영지로 보낸다는 명목하에 스페인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내려는 의도가 주요했던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